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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가 합리주의 시대에 겪은 '천박화'이야기만 끊임없이 해 대며 우쭐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천박화가, 당시 그렇게 천박화된 기독교가 행한 업적에 의해 어느 정도 다시 상쇄되었는가를 시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당성을 얻는다. 오늘날 다시금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사법부의 묵인하에 경찰관들과 형리들이, 정당한 소송 절차를 밟기도 전에 또는 재판 절차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피고한테 자백을 받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고문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매시간마다 일어나는 비참한 사건의 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다시 사용되는 고문에 대해 행동으로는 고사하고 말로도 항의조차 않고 있다. 또한 현대의 미신조차 거의 퇴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령 오늘날의 기독교가 18세기의 기독교가 취했던 이런 저런 방법을 다시 감행해 보겠다고 결심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기독교가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아무런 힘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정신적, 윤리적 본질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확고한 지반을 창지할 능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교회로서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지위를 매년 점점 강화시킴으로써 이 사실을 숨겨 버리는 자기 기만에 빠져있다. 기독교는 일종의 새로운 세속화를 통해 시대 정신에 영합하고 있다. 다른 대규모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그 조직을 점점 강화시키고 통일시킴으로써 역사적, 실제적 조직으로서 확고한 지반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기독교는 외적인 힘을 얻는 만큼 정신적 힘은 그만큼 잃고 있다.




기독교가 사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기독교는 사상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야만 한다. 기독교 자체만으로는 사고력 상실 상태와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사상으로부터 나온 근본적인 경건성이 존재하는 시대만이 기독교 사상의 영원 불변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물이 새어나가도 강물이 말라 버리지 않는 것은 지하수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근본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경건성이라는 지하수의 흐름을 필요로 하다. 사상에서 종교로 가는 길이 인간에게 막혀 있지 않을 때에만 기독교는 실제적인 정신적 힘을 얻게 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사고를 통해 종교인으로, 기독교인으로 머물러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사고하는 인간은 사고를 하지 않는 인간에 비해 전통적인 종교적 진리에 대해 더 자유롭다. 그러나 그 진리속 에 담겨있는 깊이와 영원 불변성은 사고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파악한다.

예수에 의해 전파되고 사고에 의해 파악된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인식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의지로서 체험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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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슈바이처 박사의 글입니다. 현 한국 기독교의 사항에 많은 시사점과 반성할 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뜻처럼 한국의 기독교가 '사랑'이라는 본래의 길로 다시 들어 섰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돈으로 얼룩진 예수님의 '사랑'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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