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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2.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4.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5.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들어가기 전


 :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세월호' 사건이다.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는 여러가지 진실들이 기득권의 부패와 탐욕으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딸'을 잃어버린 부모의 지켜보는 본인의 '분노'를 더욱 자극시켰고, 대한민국의 이런 역사를 되집어 보고 싶었다. 이런 죽음이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분단과 제1공화국

3.15 부정선거와 4.19

독재는 심해지고 사회적 부정부패는 만연하고...

 : 지난 역사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을 옹호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수탈', '가렴주구', '학살'을 옹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한국은 남북으로 영원히 나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반공사상'은 극에 달했다. 


 1.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라는 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신설되고 역사 청산이 이루어질 뻔 했으나 잔재 친일파들의 간교한 술수로 결국 무산되게 된다. 1951년 2월 14일 이 법은 폐지된다.

 2. 1954년 5월 20일 과반수가 안되지만 소수 이하의 자리를 반올림하여 억지로 과반수로 만든 사건. 사사오입이라고도 한다. 헌법개정안인데 그 목적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이었다. 

 3. 1960년 3월 15일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 부정선거 및 개표 조작 감행. 이것은 선거 전날 선거함에 이승만,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은 것이다. 내무부 소속 공무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이 사건으로 내무부 간부는 구속, 장관 최인규는 사형 선고 받는다.

 이 때 민주당은 담화발표를 통해서 부정선거임을 선언했다. 이날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

4. 1960년 3월 16일 마산 등지에서 시위 발생, 이에 계엄령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려고 함. 이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지금은 종북이지 아마)라고 말하면서 폭력적인 진압을 ㄱ아행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귀가하는 고려대생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5. 1960년4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 발견 이로 인해서 시위가 격화되었고 다가올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6. 이승만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 책임질 생각은 안하고 도망간거지. 그것도 미국으로. 그리고 귀국하지 않음. 검은머리 미국인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게 아닐까?

7.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 일가족은 사퇴 후에 동반 자살.

8. 4월 11일 마산에서 2차 시위가 일어 났고 마산 경찰서의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을 탈취후 경찰 서장실 앞들에 투척하기도 했다.

9. 이때 당시 민주당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진상조사단을 꾸리고 윤보선이 현장을 방문했다. 

10. 당시 시위대는 경찰에게서 무기 탈취하고 무장한 시위대들은 경찰의 총격을 받기도 했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1. 서울대 총장 윤일선에 다르면 당시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12.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 갔고 4월 23일 부통령 사임. 4월 25일 대학교수들까지 시위에 참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 계측으로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인 매타나기가 이승만을 찾아가 하야를 권유 설득함.

13. 4.19 때 사망자는 100명이 넘고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제2공화국

5.16 군사 구테타

혁명으로 독재가 물러가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오는 줄 알았지만...

 : 그동안 억압되었던 노동운동, 시민운동등이 활발히 일어 났지만, 혁명 당시 피해자와 사망자에 대한 책임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유당으로 대표되던 악랄했던 매국노 악마 집단보다는 조금 더 좋은 집단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잡은 후 민주당은 스스로 분열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나온 것이 바로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사정권이다. 그 동안의 노력이 하루 아침에 불거품이 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1.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발생 후 이틀만에 한패가 되었고,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윤보선은 유엔군 사령관 맥그루더와 미국 대리 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 병력 동원 허가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본이에게 군통수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차례로 국무총리 장면은 내각총사퇴를 발표하고, 대통령 윤보선은 하야한다. 

2. 장면이 재임동안에 10차례나 군사반란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3. 심지어 맥그루더는 쿠데타 세력을 물리치지 않으면 한국은 군사통치를 한동안 받게 될거라고 경고까지 했지만 윤보선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4. 이후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으로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 반대파를 제거.

5.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됨. 그리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됙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됨.





제3, 4공화국

경제개발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반공주의

군사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수많은 민중의 고통이 뒤따랐다.

 : 1963년 10월 15일 직접선거로 박정희가 당선된다. 이는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결과가 되었다. 당시 부산 경남의 압도적인 지지가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1.  한일국교정상화를 수많은 반대와 반대시위에도 추진. 1965년 한일협정 체결하고 자금 마련. 

 2. 사카린 밀수한 한국비료주식회사 청문회에서 김두한의 오물투척사건이 1966년 9월 22일에 발생.

 3.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호텔 대형화재로 167명 사망.

 4. 이때 재벌이 급성장했다. 자본집중이 심화되었다. 

 5.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 파견.


 베트남 파병

 : 베트남 파병은 사실 수많은 생명과 한국의 경제 발전을 서로 교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미국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들어 줘야만 했다.

1. 월남전 파병으로 한국군은 미군의 미라이 학살과 비슷한 퐁니, 퐁넛 양민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2. 약 32만명이 파병되었고 이중 5,099명이 사망했으며 11,232명이 부상당했다. 그 중에 159,132명이 고엽제에 피해를 입었다. 

3. 이 참전을 댓가로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4. 미국쪽의 이유는 미국내 만연한 반전 여론을 무마시키고 비국군 1/3급여 수준으로 전선에 투입할 수 있어서 전비가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의 그늘

 : 박정희를 찬양하는 자들, 물론 그 당시 박정희로 인해서 그 은덕을 입은 사람들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피값으로 이뤄낸 경제성이라고 봐야 한다. 

 1.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탄압은 유명하다. 사고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유신선포 후에 현해탄에서 안기부에 의해 수장될 뻔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후 가택연금으로 정치 생활이 금지되었다. 

2.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261명, 지시법으로 72명, 공무 방해 등으로 38명, 보위법 노동법으로 46명, 게엄포고령으로 53명, 내란죄로 8명, 방화죄로 9명, 경범죄처벌법으로 1,184명, 긴급조치 1호로 48명, 긴급조치 4호로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 소요죄 108명 등으로 구속. 

3. 즉, 학생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노동자 농빈 도시 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탄압 이에 대한 저항(전태일, 가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 폭동사건, 철거민 투쟁)

4.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김영삼의원 초산테러, 긴대중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5. 언론 탄압(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6.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 

7. 종교계 탄압 

8.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9.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10.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10년 동안 양심수의 총수는 2,704명(그 중 1,184명은 구류)으로 매년 270명 내외가 유신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11.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 해도 모두 1천 2백 4명에 달한다. 1974년 4월에 발생했으며 180여명이 불온세력의 조정을 받았다고 하여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이사건은 2009년 9월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사건으로 7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 12명이 20년, 6명이 15년. 사형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 기각된 지 20여 시간만에 집행.

12. 1970년대의 장발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

13. 미군을 위한 기지촌 관리. 기지촌 62개소에 9,935명이었다. 당시 의정부시 조례에 따르면 성병보균자를 검진 색출해서 수용치료하며 낙점자가 수용을 거부하거나 도피할 시 시장이나 경찰 서장의 협조를 얻어 수용치료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례는 심지어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라고 지칭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병이 완치될때까지 과도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 받았고 이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는 여성도 상당했다고 한다. 

14. 재산을 강제로 빼앗긴 자들이 많았다. 이후 47년만에 땅을 다시 찾은 사람들고 있었다. 2014년 2월 11일 농민과 유족 291명이 낸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650억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그 당시 구로수출산업공단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구로동 일대에 거주하던 농민들을 대거 쫓아 낸 것이다. 이 당시 땅을 찾으려고 했으나 사기 등으로 구속하고 수사했다. 

15.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의문사한 것으로 나온다. 추락사라고 발표됨. 그 이전에 수많은 옥고를 치뤘다.

16. 1970년 3월 17일 고급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로 암살된 사건. 수사과정에서 그 당시 권력자들의 명단이 있는 수첩이 발견되었다. 

17. 1973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중앙정보부 요원 최종선을 따라 남산의 중정 본주로 들어간뒤 행방이 묘연. 10월 19일 변사체로 발견. 당시 간접인걸 고백하고 중정 본부 7층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 최교수는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데모하다가 붙잡히자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박적의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발언함.

18. 자유당 민주당 시절 정치깡패 7명을 죽임

19. 민혁당 말고도 간첩혐의로 사형된 사람은, 최영오, 송택봉, 유익재, 조영수, 정규명 등 20명이 넘음.

20. 시위 중 자살 또는 사망한 사람이 전태일 포함 4명.

21. 그외 의문사위에 등록된 명단은 82명.

22. 1979년 10월 16일 부마에서 민주항쟁 발생. 부산대 학생 5,000여명이 시작. 시민 합세 등으로 확산. 충무파출소,  KBS, 시구청,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 경찰차량 전소 내지 파손.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 선포 1,058명 연행하고 66명 군사재판 회부. 이후 마산지역에서 민주공화당사와 파출소, 방송국 타격. 이후 급격히 확산되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피살된다. 이 당시 3명이 사망한 것으로 문서로 확인. 연행된 사람 중 20명이 실형 선고 받음. 651명이 즉결심판에 회부.

23. 부마 항쟁 당시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의 경우 총기에 착검하고 부산대와 동아대를 오가며 학생들 위협,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영문도 모른체 맞아야 했다. 전병진 씨는 한독병원을 지나다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의 개머리판에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달랐다고 한다. 시위진압 명령을 받았지만 폭력은 쓰지 않고 몸으로만 막았다고 한다.  언론에는 역시 시위대가 해병대에 엄청난 폭력을 가하는데도 비폭력을 맞선 것으로 묘사되지만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충돌 자체가 별로 없었고 예외적으로 접촉했을 때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기도 하는 등 실제론 다른 양상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상반된 평가

 : 한강의 기적을 낳은 대통령, 우리를 배부르게 해준 대통령 등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경제성장도 결국 우리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것을. 영화가 만들어지면 주인공만 기억하는 것처럼 그 영화를 위해서 노력한 수많은 스태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리고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은 댓가로 성장한 경제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그럼 앞으로 경제성장을 위해서 그 누군가는 희생해도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선한 행동으로 수많은 기관에 돈을 기탁해 도움을 주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도왔던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살인했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렸으니 용서하고 그를 기릴까? 누군가에겐 천사였고 누군가에겐 악마였다면 그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1.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2.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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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


 : 한국이 진정한 자주 독립을 지키면서 살아온 때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 원나라 이후 한국의 역사는 사대와 외세의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속국에 가까운 이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는 진정한 독립 국가로서 모든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고 진정으로 강성한 국가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국민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고 계속 부패한 외세의존의 역사를 이어가느냐가 아닐까?


해방후 근대와 6.25

해방

가까운 역사일 수록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 지금 권력은 특히 근현대사 왜곡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붙고 있다. 진실이 있다고 해도 그 진실을 축소하거나 알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한다. 지금 현재도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집단과 알 수 없는 단체 등이 모든 원인을 북한이나 소련 등으로 돌리거나 '공산주의'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것과 이승만, 박정희 등의 대통령을 옹호하는 글들이 많다. 

 : 그 당시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특성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민족말살정책과 문화정책 등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인 것일까? 극도로 흥분해서 지금까지 받았던 그 억압을 친일자들과 그 부역자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바로 가해야 했을 텐데 그것도 세세하게 한명 한명을 찾아서 척격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몇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운형의 연설 때(시민들의 요구로), 연설 방해공작이 있었는데 '소련군이 서울에 온다'는 소문을 냈는데 실상은 조선총독부 친일파 녀석들이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해서 벌인 일이다.

 2. 여운형이 몰래 조직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조직의 이름으로 경고망동 삼가의 삐라를 뿌렸다. 이는 흥분한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해올까바 두려웠던 것이다. 

 3. 해외 각지에서 활동했던 독립군과 임시정부는 해방후 바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8월 18일 일부 독립군이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요청에 미국이 굴복하면서 다시 돌아가야 했던 일이 있었다.

 4. 광복군과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올 수 있었다. 






: 이후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의 군정에 이남은 미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미군정은 1949년 6월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1. 이때 9월에 미군정이 선포되는데 이때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대거 채용된다.

 2. 미군정은 북쪽의 조선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는데 임시정부가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총파업 등을 확산시키자 이를 불법 구테타로 규정해 지원을 줄이고 온건좌파와 온건우파등에게 정권을 이양한다.

 3.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김구는 총격으로 암살당함. 미군정이 끝나간 시점.

 4.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당선.

 5.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6.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군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당시 개경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7. 1948년 2월 7일 사건 발생 - 신탁통치를 반대해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100여명 사망에 8,500명 정도 투옥.

 8. 1946년 미군정 시에 남한내 민중의 삶은 굶주림 그자체. 그건 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 대구 경북 일대에 콜레라 창궐. 대구 봉쇄. 10월 1일 대구시청에서 기아 사태 해결을 요구하다 황말용, 김종태가 총에 맞아 사망 이에 무력시위가 발생했다. 10월 민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때 반공을 주장하는 세력과 미군이 힘을 모아 탄압했던 사건이다. 이로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 받았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9.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남로당 장교들이 주도)으로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 무고한 시민이 최소 439명 학살되었다고 한다.

 10. 이후 위 사건들은 제주 4.3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1954년 9월 21일까지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6.25

수구꼴똥에게는 반공의국민적 감정을 이용하는 큰 사건이겠지만...

 : 무고한 민중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위 여러 사실들로도 알겠지만 과연 공산당이란 이름으로 무고하게 죽은자들과 그 공산당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학살한 무고한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잔인했던 것일까? 

 6.25는 이런 신탁통치로 인해 빚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이 아닐까?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기어리게 반공의 이름을 내걸고 무고한 사람을 계속학살하고 있었던 그 혼돈의 시기에 양쪽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일제에는 벗어났지만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 강대국의 통치를 받았던 이때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은 이들에게 빌붙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독립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둘 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중은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고통받았으며 대부분의 힘을 그런데 쏟았으니 6.25가 발생했을 때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권력자가 먼저 도망치는 작금의 세월호(2014년 4월 16일)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1. 북한은 전쟁준비, 남한은 그저 한가하게 직무유기. 남한 내부의 반란을 소탕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친일파는 미군에 붙어서 버젖이 살아남았는데 오죽하겠나.

2.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결집한다는 보고를 했음에도 군수뇌부는 바로 '비상경계' 해제.

3. 그날 저녁 장교클럽 파티까지 열었다.

4. 위와 같은 일 때문에, 이승만의 남침 유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5. 6.25전까지 남북간 작은 전쟁이 아주 많았다. 북한에 따르면 남한국군의 침입 횟수는 432회에 이른다고 한다. 

6.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맥아더에 전화해 도와달라고 요청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말라는 방송하고 서울 시민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물도록 독려하고 진작 자신은 각료들과 함께 대전으로 피신.

7. 대한민국 정보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와 진격할 것이 우려되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 500명이 폭사. 이로 인해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8. 소련, 중공군과 미군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미국을 남한의 최우방으로 만들어 주고 미국의 남한 통치를 정당화 시켜주는 큰 계기가 되었으리라.

9. 국민방위군. 당시 군수뇌부의 부패와 비리(예산 유용, 양곡과 피복을 빼돌림)로 9만여명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 등으로 사망.

10. 1950년 7월 25일과 7월 29일 사이에 미군에 의해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 182명의 희생자 확인. 400여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

11. 1951년 2월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 약 500명을 공비 소탕 명목으로 총살했다고 한다.

12. 1951년 2월 7일 산청군, 함양군 주민이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민간인을 대량학살했다.

13. 1951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저녁마다 매번 10명식 총으로 민간인 학살(뒤로 총으로 쏘아 사살했다고 증언). 이유는 강화도 주민들이 조선인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였다.

14. 미국 통계에 따르면 약 60만명이 전쟁 중에 사망. 참전국까지 합하면 200만명. 한국 사망자는 100만명이 넘고, 그중 85%가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1.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2.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4.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5.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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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2.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4.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5.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들어가기 전


 : 지금도 한국은 자신의 권력과 권세, 금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누가 되었건 힘이 있다면 그 밑에 들어가 온갖 아양을 떨어대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앞으로도 계속될 이런 서민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다시 짚어 보았으면 한다.


신라시대

나당연합

사실 삼국통일의 키는 당나라를 끌어 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명망시킨 것이다.

 : 백제와 고구려 어느 둘이 분명 '당나라'와 결탁을 했을 수도 있다. 특히 백제가 그러혔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각 다른 나라로 보고 서로 동맹과 연합을 한 것을 본다면 누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 후에 당나라는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5도독부', '안동도호부' 등을 설치해서 각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다. 그 동안 '당나라'라는 외세에 의해서 '서민'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 물론 얼마가지 못했지만...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를 몰아 내고 남쪽에는 '신라'라는 나라가 북쪽에는 '발해'라는 나라가 자리를 잡게 된다.


신라 후기

농민봉기가 일어 났다.

 : 사실 이때는 아노미 그 자체였다고 한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농민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져서 '원종'이나 '애노' 같은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들어봄직한 '견휜'도 이 때 나타났다. 이는 타락한 지배계층의 수탈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발생했다. 이때 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 외세에 의존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농민봉기가 완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하고 싶지만 타락한 지배계급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이 때 진성여왕과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고려

고려 중기

농민과 노비의 난

 : 의종 때(1127 ~ 1173) 농민수탈이 심해지고 지배계급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에 자극되어 발생했다. 초기에는 산발적으로 일어나다가, 망이 망소이의 봉기, 손청과 이광의 반란 등이 일어났다. 이후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일어났고 1198년에는 '만적의 난'이 일어났다. 이렇게 작게 발생한 난은 성공하지 못하고 모두 진압되었다.  이런 반란의 배경에는 무신 정권 즉 1170년 즈음 발생한 무신 정권은 현대 한국사에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의 정권장악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하자 마자 관직과 부를 독점했다. 이후 최충헌이 이런 반란을 진압하고 '최 씨 정권'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무신정권은 바로 이러한 혼란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신정권의 기간은 짧은 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몽골'의 등장일 것이다.


원나라

무신의 붕괴와 외세 간섭의 시작

 : 아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세력들이 나타났을 것으로본다. 원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와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 때부터 왕실과 이를 통해서 출세한 문신 그리고 권문세족의 서민 수탈이 시작된다. 이때 몽골과의 통역관 등이 출세를 하게 된다. 고려왕은 원나라의 왕실과 결혼 등을 한다. 

권문세가는 원나라의 강력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외세를 등에업고 지배하는 동안 자연히 부패와 가렴주구는 늘어났다. 

이는 곧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된다.


조선

임진왜란

국가 수장의 도망과 이순신

 : 임진왜란 발생 전 조선은 한마디로 개판. 극심한 부패, 권력쟁탈전 등. 게다가 명과는 사대주의를 유지하고 있었고. 원나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의 입김은 있었으니... 명에 조공을 바치고 여진족 문제 등 신하로서의 지위를 요구했으니 작금의 한미관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지금이 더 나쁘다고 해야 하나. 알게 모르게 미국에 줄거 양껏 주고 있으니...천문학적인 돈을...

  그러니깐, 그 동안 부패로 많이 무너진 조선에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일본이 쳐들어오고, 게다가 오기 전 일본 침략가능성을 그렇게 언급했는데 개간신배들이 그것을 묵살한데다 육지에서 도륙 당하는 동안 왕이란 작자는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그리고, 서대주의에 얽혀서 도움을 청한 곳은 '명나라'. 그리고 명나라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실 도와준다는 것보다는 명나라까지 밀고 들어오면 그 부담은 더 클 것이기에 참여한 측면이 더 강했던 것이지. 

 임진왜란 승리의 근본원동력은 그 당시 '백성' 그리고 이순신과 그 수군이었다. 

 그나마 '광해군'이 온 지방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모으고 다독여서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정도였다. 

 조선 명의 군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의 군량 조달을 막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순신의 인기가 두려워(조선이 한나라의 장군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 아니었던가?) 혹시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얼마나 시험하고 끌어 내려고 안달이었던가? 

 즉, '백성'의 안위와 생명보다는 자신의 자리와 기득권이 더 중요했던 '조선'의 상황은 지금에 보여주는 썩어 문드러진 권력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으로 사망한 인원은 18만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러니깐 이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심한 부패의 그 피해가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알량한 사대주의와 간신배 그리고 인조반정

 : 광해군은 금과 명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인조반적으로 폐외되고 정책은 금선회. 친명배금 정책을 세우게 된다. 명분은 당연히 임진왜란 때 도왔으니... 지네들 잘못한 건 생각도 안하고 말이다. 금나라는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 

 정묘호란은 광해군 보복 명분으로 금이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이미 썩을 데로 썩은 조선은 강화조약을 맺고 금은 철수.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이 되었다. 빌어먹을 그 친명이라는 사대주의는 어디간거니? 결국 안되겠으니 금나라에 오케이한거지. 이후 금은 식량, 병선 등을 제공하고 '군신지의'를 요구하는 등 별걸 다했지. 이에 반발해서 일어난게 바로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여진족(홍타이지)이 금나라를 세우고 금 이후 다른 곳을 정벌한 후에 '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이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사대를 요구한 것이다. 

 청나라 태종이 약 10만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 결과는? 당근 임진왜란을 겪고도 정신 못차린 수구꼴통 세력이 있었고 백성인 피패했고 그 좋은 장수들은 다죽었고. 즉 지금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뭘하겠니?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사대주의가 시작된다. 


 조선의 부패로 인해서 포로가 된 것을 제외하고도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 뿐이랴 도륙당한 백성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이후 고통받은 백성의 수를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

아직도 정신 못차린 사대주의와 간신배들

 : 일본을 등에업고 청나라를 등에 없는 간신배를 척결하려고 했던게 '갑신정변'. 당시는 청나라에 의해서 실패했다. 바로 군사지원을 해줬겠지.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청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갑론을박하는 동안 죽어나는 건 역시 '백성'들. 그때까지고 자신의 기득권과 권력을 놓지 못하고 일본의 경제 침투를 보고만 있고... 이에 발생한게 바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운 '동학농민운동'이다. 이때 빌어먹을 기득권 새끼들이 일본군과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한거다. 

 다른 나라의 군대를 빌어서 자국 '백성'을 학살한 것이지. 지 기득권과 권력을 지키자고. 이러니 조선이 제대로 될리가 있나. 

 이 사건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빌미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게 된거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일본'의 앞잡이들의 시대다. 






일제시대와 근대

경술국치와 조선총독부

이완용과 그 무리들의 강제 조약, 그리고 그때도 여전했던 가렴주구

 : 소위 기득권이라는게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만 유지된다면 누가 한국을 지배하든 상관없는 새끼들이다.  경술국치(을사조약)에 반대한 이들 중 '윤치호'라는 자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아첨하는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은 무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악화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런 시절에도 힘없는 백성을 상대로 탄압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지주도 상당한 이익을 얻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 창시자인 '이병철'이라고 한다. 삼성의 악랄함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민족말살정책

3.1운동 이후 더 악날하고 교묘해진 통치

 : 소위 문화통치라는 말로 가렴주구를 아주 세련되게 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가보안법'의 모태인 '치안유지법'이 만들어 졌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무원 채용으 인기는 아주 높았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로 10대1의 경쟁률이 되는 등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순사도 인기직종이었단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위해서 징병이 많았고, 위안부가 만들어졌던 때도 이때다. 

 그리고 창씨 개명과 일본어를 강용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했다. 

 이 당시에 수많은 백성이 받았을 고통과 슬픔은 이루말할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식 백성들을 일본이 살려둬야 하는 것은 '노동력' 착취가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즉, 노예아닌 노예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부패와 무능이 이후 일제치하의 시대라는 그 무엇보다도 무시무시한 백성의 고통을 가져왔다. 그 시기에서 조차도 양심을 팔고 악에 앞장선 이들이 있었고 현재 기득권의 뿌리가 그때와 연결되어 있다. 

  1.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2.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4.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5.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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