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들어가기 전
: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세월호' 사건이다.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는 여러가지 진실들이 기득권의 부패와 탐욕으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딸'을 잃어버린 부모의 지켜보는 본인의 '분노'를 더욱 자극시켰고, 대한민국의 이런 역사를 되집어 보고 싶었다. 이런 죽음이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분단과 제1공화국
3.15 부정선거와 4.19
독재는 심해지고 사회적 부정부패는 만연하고...
: 지난 역사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을 옹호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수탈', '가렴주구', '학살'을 옹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한국은 남북으로 영원히 나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반공사상'은 극에 달했다.
1.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라는 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신설되고 역사 청산이 이루어질 뻔 했으나 잔재 친일파들의 간교한 술수로 결국 무산되게 된다. 1951년 2월 14일 이 법은 폐지된다.
2. 1954년 5월 20일 과반수가 안되지만 소수 이하의 자리를 반올림하여 억지로 과반수로 만든 사건. 사사오입이라고도 한다. 헌법개정안인데 그 목적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이었다.
3. 1960년 3월 15일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 부정선거 및 개표 조작 감행. 이것은 선거 전날 선거함에 이승만,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은 것이다. 내무부 소속 공무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이 사건으로 내무부 간부는 구속, 장관 최인규는 사형 선고 받는다.
이 때 민주당은 담화발표를 통해서 부정선거임을 선언했다. 이날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
4. 1960년 3월 16일 마산 등지에서 시위 발생, 이에 계엄령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하려고 함. 이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지금은 종북이지 아마)라고 말하면서 폭력적인 진압을 ㄱ아행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귀가하는 고려대생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5. 1960년4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 발견 이로 인해서 시위가 격화되었고 다가올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6. 이승만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 책임질 생각은 안하고 도망간거지. 그것도 미국으로. 그리고 귀국하지 않음. 검은머리 미국인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게 아닐까?
7.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 일가족은 사퇴 후에 동반 자살.
8. 4월 11일 마산에서 2차 시위가 일어 났고 마산 경찰서의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을 탈취후 경찰 서장실 앞들에 투척하기도 했다.
9. 이때 당시 민주당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진상조사단을 꾸리고 윤보선이 현장을 방문했다.
10. 당시 시위대는 경찰에게서 무기 탈취하고 무장한 시위대들은 경찰의 총격을 받기도 했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1. 서울대 총장 윤일선에 다르면 당시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12.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 갔고 4월 23일 부통령 사임. 4월 25일 대학교수들까지 시위에 참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 계측으로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인 매타나기가 이승만을 찾아가 하야를 권유 설득함.
13. 4.19 때 사망자는 100명이 넘고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제2공화국
5.16 군사 구테타
혁명으로 독재가 물러가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오는 줄 알았지만...
: 그동안 억압되었던 노동운동, 시민운동등이 활발히 일어 났지만, 혁명 당시 피해자와 사망자에 대한 책임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유당으로 대표되던 악랄했던 매국노 악마 집단보다는 조금 더 좋은 집단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잡은 후 민주당은 스스로 분열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나온 것이 바로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사정권이다. 그 동안의 노력이 하루 아침에 불거품이 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1.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발생 후 이틀만에 한패가 되었고,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윤보선은 유엔군 사령관 맥그루더와 미국 대리 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 병력 동원 허가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본이에게 군통수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차례로 국무총리 장면은 내각총사퇴를 발표하고, 대통령 윤보선은 하야한다.
2. 장면이 재임동안에 10차례나 군사반란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3. 심지어 맥그루더는 쿠데타 세력을 물리치지 않으면 한국은 군사통치를 한동안 받게 될거라고 경고까지 했지만 윤보선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4. 이후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으로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 반대파를 제거.
5.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됨. 그리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됙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됨.
제3, 4공화국
경제개발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반공주의
군사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수많은 민중의 고통이 뒤따랐다.
: 1963년 10월 15일 직접선거로 박정희가 당선된다. 이는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결과가 되었다. 당시 부산 경남의 압도적인 지지가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1. 한일국교정상화를 수많은 반대와 반대시위에도 추진. 1965년 한일협정 체결하고 자금 마련.
2. 사카린 밀수한 한국비료주식회사 청문회에서 김두한의 오물투척사건이 1966년 9월 22일에 발생.
3.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호텔 대형화재로 167명 사망.
4. 이때 재벌이 급성장했다. 자본집중이 심화되었다.
5.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 파견.
베트남 파병
: 베트남 파병은 사실 수많은 생명과 한국의 경제 발전을 서로 교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미국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들어 줘야만 했다.
1. 월남전 파병으로 한국군은 미군의 미라이 학살과 비슷한 퐁니, 퐁넛 양민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2. 약 32만명이 파병되었고 이중 5,099명이 사망했으며 11,232명이 부상당했다. 그 중에 159,132명이 고엽제에 피해를 입었다.
3. 이 참전을 댓가로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4. 미국쪽의 이유는 미국내 만연한 반전 여론을 무마시키고 비국군 1/3급여 수준으로 전선에 투입할 수 있어서 전비가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의 그늘
: 박정희를 찬양하는 자들, 물론 그 당시 박정희로 인해서 그 은덕을 입은 사람들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피값으로 이뤄낸 경제성이라고 봐야 한다.
1.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탄압은 유명하다. 사고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유신선포 후에 현해탄에서 안기부에 의해 수장될 뻔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후 가택연금으로 정치 생활이 금지되었다.
2.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261명, 지시법으로 72명, 공무 방해 등으로 38명, 보위법 노동법으로 46명, 게엄포고령으로 53명, 내란죄로 8명, 방화죄로 9명, 경범죄처벌법으로 1,184명, 긴급조치 1호로 48명, 긴급조치 4호로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 소요죄 108명 등으로 구속.
3. 즉, 학생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노동자 농빈 도시 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탄압 이에 대한 저항(전태일, 가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 폭동사건, 철거민 투쟁)
4.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김영삼의원 초산테러, 긴대중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5. 언론 탄압(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6.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
7. 종교계 탄압
8.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9.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10.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10년 동안 양심수의 총수는 2,704명(그 중 1,184명은 구류)으로 매년 270명 내외가 유신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11.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 해도 모두 1천 2백 4명에 달한다. 1974년 4월에 발생했으며 180여명이 불온세력의 조정을 받았다고 하여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이사건은 2009년 9월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사건으로 7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 12명이 20년, 6명이 15년. 사형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 기각된 지 20여 시간만에 집행.
12. 1970년대의 장발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
13. 미군을 위한 기지촌 관리. 기지촌 62개소에 9,935명이었다. 당시 의정부시 조례에 따르면 성병보균자를 검진 색출해서 수용치료하며 낙점자가 수용을 거부하거나 도피할 시 시장이나 경찰 서장의 협조를 얻어 수용치료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례는 심지어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라고 지칭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병이 완치될때까지 과도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 받았고 이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는 여성도 상당했다고 한다.
14. 재산을 강제로 빼앗긴 자들이 많았다. 이후 47년만에 땅을 다시 찾은 사람들고 있었다. 2014년 2월 11일 농민과 유족 291명이 낸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650억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그 당시 구로수출산업공단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구로동 일대에 거주하던 농민들을 대거 쫓아 낸 것이다. 이 당시 땅을 찾으려고 했으나 사기 등으로 구속하고 수사했다.
15.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의문사한 것으로 나온다. 추락사라고 발표됨. 그 이전에 수많은 옥고를 치뤘다.
16. 1970년 3월 17일 고급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로 암살된 사건. 수사과정에서 그 당시 권력자들의 명단이 있는 수첩이 발견되었다.
17. 1973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중앙정보부 요원 최종선을 따라 남산의 중정 본주로 들어간뒤 행방이 묘연. 10월 19일 변사체로 발견. 당시 간접인걸 고백하고 중정 본부 7층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 최교수는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데모하다가 붙잡히자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박적의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발언함.
18. 자유당 민주당 시절 정치깡패 7명을 죽임
19. 민혁당 말고도 간첩혐의로 사형된 사람은, 최영오, 송택봉, 유익재, 조영수, 정규명 등 20명이 넘음.
20. 시위 중 자살 또는 사망한 사람이 전태일 포함 4명.
21. 그외 의문사위에 등록된 명단은 82명.
22. 1979년 10월 16일 부마에서 민주항쟁 발생. 부산대 학생 5,000여명이 시작. 시민 합세 등으로 확산. 충무파출소, KBS, 시구청,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 경찰차량 전소 내지 파손.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 선포 1,058명 연행하고 66명 군사재판 회부. 이후 마산지역에서 민주공화당사와 파출소, 방송국 타격. 이후 급격히 확산되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피살된다. 이 당시 3명이 사망한 것으로 문서로 확인. 연행된 사람 중 20명이 실형 선고 받음. 651명이 즉결심판에 회부.
23. 부마 항쟁 당시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의 경우 총기에 착검하고 부산대와 동아대를 오가며 학생들 위협,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영문도 모른체 맞아야 했다. 전병진 씨는 한독병원을 지나다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의 개머리판에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달랐다고 한다. 시위진압 명령을 받았지만 폭력은 쓰지 않고 몸으로만 막았다고 한다. 언론에는 역시 시위대가 해병대에 엄청난 폭력을 가하는데도 비폭력을 맞선 것으로 묘사되지만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충돌 자체가 별로 없었고 예외적으로 접촉했을 때 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기도 하는 등 실제론 다른 양상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상반된 평가
: 한강의 기적을 낳은 대통령, 우리를 배부르게 해준 대통령 등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 경제성장도 결국 우리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라는 것을. 영화가 만들어지면 주인공만 기억하는 것처럼 그 영화를 위해서 노력한 수많은 스태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리고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수많은 사람이 고통 받은 댓가로 성장한 경제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그럼 앞으로 경제성장을 위해서 그 누군가는 희생해도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선한 행동으로 수많은 기관에 돈을 기탁해 도움을 주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도왔던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살인했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렸으니 용서하고 그를 기릴까? 누군가에겐 천사였고 누군가에겐 악마였다면 그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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