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5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4부 (2)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3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2부
- 2017.02.03 기득권과 권력 - 대한민국 간신배와 외세 의존의 역사 1부
들어가기 전
: 한국이 진정한 자주 독립을 지키면서 살아온 때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 원나라 이후 한국의 역사는 사대와 외세의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속국에 가까운 이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는 진정한 독립 국가로서 모든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고 진정으로 강성한 국가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국민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고 계속 부패한 외세의존의 역사를 이어가느냐가 아닐까?
해방후 근대와 6.25
해방
가까운 역사일 수록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 지금 권력은 특히 근현대사 왜곡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붙고 있다. 진실이 있다고 해도 그 진실을 축소하거나 알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한다. 지금 현재도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집단과 알 수 없는 단체 등이 모든 원인을 북한이나 소련 등으로 돌리거나 '공산주의'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것과 이승만, 박정희 등의 대통령을 옹호하는 글들이 많다.
: 그 당시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특성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민족말살정책과 문화정책 등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인 것일까? 극도로 흥분해서 지금까지 받았던 그 억압을 친일자들과 그 부역자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바로 가해야 했을 텐데 그것도 세세하게 한명 한명을 찾아서 척격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몇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운형의 연설 때(시민들의 요구로), 연설 방해공작이 있었는데 '소련군이 서울에 온다'는 소문을 냈는데 실상은 조선총독부 친일파 녀석들이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해서 벌인 일이다.
2. 여운형이 몰래 조직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조직의 이름으로 경고망동 삼가의 삐라를 뿌렸다. 이는 흥분한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해올까바 두려웠던 것이다.
3. 해외 각지에서 활동했던 독립군과 임시정부는 해방후 바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8월 18일 일부 독립군이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요청에 미국이 굴복하면서 다시 돌아가야 했던 일이 있었다.
4. 광복군과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올 수 있었다.
: 이후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의 군정에 이남은 미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미군정은 1949년 6월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1. 이때 9월에 미군정이 선포되는데 이때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대거 채용된다.
2. 미군정은 북쪽의 조선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는데 임시정부가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총파업 등을 확산시키자 이를 불법 구테타로 규정해 지원을 줄이고 온건좌파와 온건우파등에게 정권을 이양한다.
3.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김구는 총격으로 암살당함. 미군정이 끝나간 시점.
4.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당선.
5.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6.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군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당시 개경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7. 1948년 2월 7일 사건 발생 - 신탁통치를 반대해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100여명 사망에 8,500명 정도 투옥.
8. 1946년 미군정 시에 남한내 민중의 삶은 굶주림 그자체. 그건 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 대구 경북 일대에 콜레라 창궐. 대구 봉쇄. 10월 1일 대구시청에서 기아 사태 해결을 요구하다 황말용, 김종태가 총에 맞아 사망 이에 무력시위가 발생했다. 10월 민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때 반공을 주장하는 세력과 미군이 힘을 모아 탄압했던 사건이다. 이로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 받았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9.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남로당 장교들이 주도)으로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 무고한 시민이 최소 439명 학살되었다고 한다.
10. 이후 위 사건들은 제주 4.3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1954년 9월 21일까지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6.25
수구꼴똥에게는 반공의국민적 감정을 이용하는 큰 사건이겠지만...
: 무고한 민중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위 여러 사실들로도 알겠지만 과연 공산당이란 이름으로 무고하게 죽은자들과 그 공산당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학살한 무고한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잔인했던 것일까?
6.25는 이런 신탁통치로 인해 빚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이 아닐까?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기어리게 반공의 이름을 내걸고 무고한 사람을 계속학살하고 있었던 그 혼돈의 시기에 양쪽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일제에는 벗어났지만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 강대국의 통치를 받았던 이때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은 이들에게 빌붙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독립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둘 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중은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고통받았으며 대부분의 힘을 그런데 쏟았으니 6.25가 발생했을 때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권력자가 먼저 도망치는 작금의 세월호(2014년 4월 16일)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1. 북한은 전쟁준비, 남한은 그저 한가하게 직무유기. 남한 내부의 반란을 소탕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친일파는 미군에 붙어서 버젖이 살아남았는데 오죽하겠나.
2.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결집한다는 보고를 했음에도 군수뇌부는 바로 '비상경계' 해제.
3. 그날 저녁 장교클럽 파티까지 열었다.
4. 위와 같은 일 때문에, 이승만의 남침 유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5. 6.25전까지 남북간 작은 전쟁이 아주 많았다. 북한에 따르면 남한국군의 침입 횟수는 432회에 이른다고 한다.
6. 이승만은 6.25가 발발하자 맥아더에 전화해 도와달라고 요청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말라는 방송하고 서울 시민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물도록 독려하고 진작 자신은 각료들과 함께 대전으로 피신.
7. 대한민국 정보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와 진격할 것이 우려되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 500명이 폭사. 이로 인해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8. 소련, 중공군과 미군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미국을 남한의 최우방으로 만들어 주고 미국의 남한 통치를 정당화 시켜주는 큰 계기가 되었으리라.
9. 국민방위군. 당시 군수뇌부의 부패와 비리(예산 유용, 양곡과 피복을 빼돌림)로 9만여명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 등으로 사망.
10. 1950년 7월 25일과 7월 29일 사이에 미군에 의해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 182명의 희생자 확인. 400여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
11. 1951년 2월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 약 500명을 공비 소탕 명목으로 총살했다고 한다.
12. 1951년 2월 7일 산청군, 함양군 주민이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민간인을 대량학살했다.
13. 1951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저녁마다 매번 10명식 총으로 민간인 학살(뒤로 총으로 쏘아 사살했다고 증언). 이유는 강화도 주민들이 조선인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였다.
14. 미국 통계에 따르면 약 60만명이 전쟁 중에 사망. 참전국까지 합하면 200만명. 한국 사망자는 100만명이 넘고, 그중 85%가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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